◈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신앙 (계1:9)
우리가 예수님의 환난을 십자가를 지신 것만을 생각한다면 감동을 받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금방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평생을 살면서 자범죄를 짓고
살았는데 (약1:15)에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제사장에게 소나 양, 비둘기를 가져가 속죄제를 드려
짐승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대신 지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한 마리의 양으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게 하심으로 어떠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의 공로를 믿으면 죄에서 속죄 받게 되었다.
1)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사람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모여들었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도망갔다.
(마26:69-75)에 베드로가 바깥뜰에 있었다고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하던
베드로, 주님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칼을 빼들어 말고의 귀를 자르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계신 안뜰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뜰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 곳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이들이 모두 흩어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보다는 두려움의 분량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은 아직 그들의 속에 성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2)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사람들.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이다.
열두제자 중에 한명은 예수님을 팔았고, 한명은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아홉 명은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 열두제자 중에 제일 어린 사도요한만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으며 예수님의 유언까지 받았다.
어린 사도요한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보는 그 자체가 고난이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찔려 피가 흐르고 옆구리에는 창이 꽂혀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으로 얼굴에 피가 흐르시면서 신음소리를 내실 때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매고 갈수도 없었고, 물을 한 모금 드릴수도 없었다. 단지 예수님이 죽어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계1:9)에 사도요한이 말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사도요한에게는 환난 날에 온 인류를 살릴 수 있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고 또한 사도요한은 최고의 영계 축복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부터 아라비아 사막에 들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학문을 분토와 같이 여기고
진정한 신학을 하였다.
그는 훗날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흔적을 찾노라”할 만큼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으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다.
후에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와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는데
(요5:24) 그들은 영생을 얻었고
(히11:35) 또한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바라보았다.
3)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고난의 형제.
우리가 환난에 동참하여 고난을 받으면 사도요한의 형제가 되는데
작은 책을 꿀같이 먹은 종이 배에서 쓰게 되는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
은혜시대의 고난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고
환난시대의 고난은 밧모섬에 가는 고난이다.
이 복음을 바로 받으면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혼자가 되게 되니
즉, 밧모섬에 혼자가 된 것 같은 고난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혼자가 되더라도 끝까지 따라가므로 고난의 형제가 되고 그 아픔으로 인하여 눈물은 흘러도 슬프지 않다. 그것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함으로 오는 아픔이기
때문이다.